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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하면서 자기 자신이 더 싫어진 경험이 있으신가요. 넷플릭스와 티빙에서 꾸준히 회자되는 도시 남녀 로맨스 드라마들이 공통적으로 다루는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달달한 로맨스물이겠거니 하고 봤는데, 보다 보니 이건 연애 드라마가 아니라 한 사람이 스스로를 찾아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은오라는 인물이 '선아'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과정이 남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자아성장: 가면을 쓴다는 건 나를 지우는 일이다
이은오는 직장도 잃고, 사랑도 배신당한 뒤 양양으로 떠납니다. 거기서 그녀는 '윤선아'라는 다른 이름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겁쟁이 이은오는 버리고,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선아가 되기로 한 것이죠.
여기서 드라마가 꽤 날카롭게 건드리는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페르소나(Persona)'입니다. 페르소나란 원래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는 말로,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사회적 자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진짜 나와 남들에게 보이는 나 사이의 간격입니다.
은오가 선아로 살면서 더 밝아지고 더 당당해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게 진짜 자기 자신이냐고 물으면, 드라마는 대답을 미룹니다. 재원에게 "내가 윤선아가 아니라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저는 뭔가 묵직한 걸 느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입니다.
사교성이 없는 제 성격이 싫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활발한 친구들을 따라서 불편한 동아리에 나가고, 단체 여행에 참여하고, 어울리고 싶지 않은 뒷풀이 자리에도 억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친해지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모임이 끝나고 나서 사적으로 연락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건 가 아니었고, 제가 원하는 관계 방식도 아니었던 겁니다.
드라마 속 은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아로 살면서 재원을 사랑했지만, 재원이 "선아는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둘의 관계는 흔들립니다. 상대가 사랑한 건 진짜 나인지,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인지 불분명해질 때 연애는 굉장히 외로워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불일치 이론(Self-discrepancy theory)'으로 설명합니다. 자기불일치 이론이란 내가 실제로 인식하는 자신과 이상적인 자신, 혹은 타인이 기대하는 자신 사이의 괴리가 클수록 심리적 불안과 자존감 저하가 심해진다는 이론입니다. 은오가 선아로 살수록 불안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봅니다.
정체성 혼란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경찰서 장면입니다. 재원 앞에서 자신의 진짜 이름을 숨겨야 했던 그 순간, 은오는 선아로도 은오로도 존재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느 쪽도 온전히 내세울 수 없는 상태. 제 경험으로 돌아가 보면, 그게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압니다. 결국 그냥 저대로 살기로 결심했을 때 오히려 맞는 사람을 찾게 됐습니다.
- 페르소나(Persona):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 만든 사회적 자아. 진짜 나와 간격이 클수록 관계가 흔들린다
- 자기불일치가 심해질수록 불안과 자존감 저하가 동반된다 (출처: 미국심리학회(APA))
- 은오의 이중 정체성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자기보호 기제(Defense mechanism)에 가깝다
- 자기보호 기제란 심리적 위협에서 자아를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심리 방어 전략을 말한다
로맨스드라마인데 왜 연애보다 정체성이 더 와닿을까
이 드라마를 처음 틀었을 때는 솔직히 재원과 은오의 설레는 장면들을 기대했습니다. 양양 바닷가에서 캠핑카를 빌리고, 폐교 운동장에서 운전 연습을 하고, 비 오는 들판으로 달려가는 장면들은 분명 설렜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머릿속에 남은 건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이 아니라 은오가 거울 앞에서 "미안해, 내가 다 갚을게"라고 혼자 중얼거리던 장면이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로맨스의 외피를 입은 성장 서사라는 점은 구조에서도 드러납니다. 통상적인 로맨스드라마는 '만남 → 갈등 → 재결합'의 서사 구조(Narrative arc)를 따릅니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뼈대로, 인물이 어떤 순서로 변화하고 어떤 방식으로 갈등을 해소하는지를 결정하는 틀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만남 → 갈등 → 자기 발견 → 재결합'으로 흐릅니다. 재결합이 목적지가 아니라 자기 발견이 목적지인 구조입니다.
재원과 은오가 다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재원이 건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옛날에 착하고 얌전했던 이은오도, 내가 만나 사랑했던 윤선아도, 지금 내 눈앞의 이은오도 너는 그냥 다 너야." 이 대사 하나가 드라마 전체를 요약합니다. 선아가 별개의 사람이 아니라 은오 안에 원래부터 있었던 면이라는 것.
저도 비슷한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사교적인 척 노력하던 시절에 만든 관계는 모임이 끝나면 흩어졌고, 그냥 제 성격대로 소수의 사람과 깊게 어울렸을 때 오래 남는 관계가 생겼습니다. 활발한 제 모습이 가짜가 아니라, 그게 저의 한 면이 맞긴 했습니다. 다만 그걸 강제로 꺼내려 했을 때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졌던 것뿐이었습니다.
드라마 속 친구들이 은오에게 "옛날의 너도 좋았어, 지금의 너도 좋아, 넌 그냥 다 너야"라고 말해주는 장면은 짧지만 강합니다.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 관점에서 보면, 안정적 애착 기반이 있는 관계일수록 상대가 변해도 관계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애착 이론이란 어릴 적 형성된 정서적 유대 방식이 성인이 된 후의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으로, 안정형·불안형·회피형 등으로 분류됩니다. 은오가 친구들 앞에서 비로소 무너질 수 있었던 건 그 관계가 안정형 애착에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출처: 세계보건기구(WHO) 정신건강 자료).
이 드라마가 다른 로맨스물과 달리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연애를 통해 상대를 얻는 이야기가 아니라, 연애를 계기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그런 연애가 실제로 가장 오래 남기도 하고요.
자주 묻는 질문
Q. 이 드라마 장르가 로맨스인가요 성장물인가요?
A. 표면적으로는 도시 남녀의 로맨스를 따라가지만, 실질적인 서사 중심은 이은오의 자아 찾기입니다. 두 사람의 재결합이 결말이긴 하지만, 그보다 은오가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로맨스를 원하고 보기 시작했다가 성장 드라마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Q. 은오가 왜 재원 앞에서 진짜 이름을 숨겼나요?
A. 가장 큰 이유는 재원이 친구 경준의 사촌 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선아라는 이름으로 살며 만든 관계가 현실 인맥과 연결될까 두려웠던 것이죠. 그보다 더 깊은 이유는, 재원이 사랑한 선아가 진짜 자신이 아닐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사랑받을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Q. 자신의 성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억지로 바꾸려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은오의 이야기가 주는 힌트는 '바꾸는 게 아니라 꺼내는 것'입니다. 활발하고 자유로운 면이 선아 안에 있었던 게 아니라, 원래 은오 안에 있었습니다. 억지로 다른 사람이 되려 하면 지치고, 관계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그냥 자신의 방식대로 맞는 사람 소수와 깊게 어울리는 쪽이 훨씬 오래가는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Q. 재원이 1년 동안 은오를 찾아다닌 게 집착 아닌가요?
A. 경계선이 모호한 부분이긴 합니다. 파출소를 여섯 번 찾아가고, 술에 취해 환영을 보는 장면은 분명 건강한 모습은 아닙니다. 다만 드라마는 이를 집착보다 '이별의 이유를 알지 못해 매듭을 짓지 못한 상태'로 그립니다. 제대로 된 마무리 없이 사라진 관계가 남기는 심리적 공백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결론
이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연애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상대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 은오가 선아로 살며 재원을 만난 건 실수였을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이 없었다면 진짜 이은오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자신의 성격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사람처럼 살아보려 했던 경험이 있으시다면, 이 드라마가 꽤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올 겁니다. 억지로 바꾸려는 노력이 지쳤다면, 지금 그 자리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천천히 다시 들여다보는 게 먼저입니다. 은오가 그랬듯, 그 답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자기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